

세계 SF 만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엥키 빌랄은 만화 언어와 영화 언어를 오가며 독창적인 시각 이미지를 창조한 인물이다. 만화와 영화에서 늘 미래를 배경으로 복잡한 세계를 건설하지만 그 안에서 언제나 예술과 인류의 현재를 고민하는 빌랄의 상상력은 곧 프랑스 만화의 현재와 이어진다.
"그러니까, 당신의 원작 만화 '니코폴' 3부작 가운데 두 번째인 '여인의 함정'을 바탕으로 영화 <우먼트랩>을 만들면서..."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엥키 빌랄이 말을 가로막는다. "아니, 이건 전혀 다른 작품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 원작 만화를 압축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12년 전에 그린 내 만화 '니코폴' 3부작은 나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시 들춰볼 생각도 안 했다." 그리고는 여태껏 쓰고 있던 짙은 색 선글라스를 벗어버렸다.
'니코폴' 3부작은 필립 드뤼예, 뫼비우스와 더불어 세계 SF 만화의 3대 거장 가운데 한 명인 엥키 빌랄,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총통 선거를 앞두고 권력의 암투가 치열하던 2023년의 독립 도시 공화국 파리를 배경으로 30년간 냉동됐다 깨어난 사나이 알시드 니코폴이 독수리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한 이집트 신 호루스를 만나 신들의 암투와 인간의 암투 사이에 끼어들게 된다는 내용이다. 니코폴은 극빈 계층과 소수 백인 부유 계층만이 살고 있는 미래의 파리에서 이 혼란한 세계를 버텨 내기 위해 보들레르의 시구를 암송하며 폐인처럼 살아간다. 1부 '신들의 카니발'부터 2부 '여인의 함정', 3부 '적도의 추위'에 이르기까지 이 방대한 설정의 만화가 완결되는 데 총 12년의 세월이 걸렸다. 심지어 완결된 3부작은 프랑스의 권위 있는 서평지 '리르'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와 당시의 모든 예술 출판물을 통틀어 '그 해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난감했다. 하지만 빌랄의 태도는 당당했다.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만화의 단편적인 느낌만으로 <우먼트랩>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선택을 하긴 했지만 철저히 본능에 따라 만든 전혀 새로운 것이다. 만화의 캐릭터들이 영화에 등장하지만 그들의 생각, 행동, 관계는 모두 달라졌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새로운 언어, 드로잉에서 그래픽으로
<우먼트랩>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살아 있는 배우를 제외한 모든 배경과 이미지가 CG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최근 주드 로가 주연한 할리우드영화 <월드 오브 투모로>나 일본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캐샨>, 프랭크 밀러의 만화가 원작인 <신 시티> 등이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지만 <우먼트랩>의 색감은 이들과는 또 다르다. 원작 만화에서 물감을 수십 차례 덧칠한 유화처럼 끈끈하고 관능적이면서 놀랄 만큼 치밀하게 미래의 세상을 그려내던 빌랄의 드로잉은 <우먼트랩>에서 푸른 빛과 잿빛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묘하게 뒤엉킨 그래픽 화면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전시일까 아니면 첨단의 기술력을 예술적 표현력으로 끌어올려 보겠다는 자신감일까? "예상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할리우드가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는 첨단 테크닉을 예술적 도구로 이용해 보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프랑스 관객들은 이런 용기 있는 도전을 이해해 주고 있는 편이다."
프랑스 만화의 견고한 토양
엥키 빌랄의 활약도 대단했다. 그의 작품은 6년에 한 번꼴로 출간돼 왔지만 그때마다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우먼트랩>을 비롯해 <벙커 펠리스 호텔> <타이코 문> 등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알랭 레네의 <인생은 한 편의 소설이다>에서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영화 외에도 오페라 무대 디자인, 의상과 음반, 영화 포스터, SF 소설 표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로 발을 뻗어 나가고 있다. 다루고자 하는 정치적 이슈나 철학적 깊이에 있어서 다른 어떤 학자나 문학가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 프랑스 만화 거장들의 작품은 만화를 예술의 지평, 고급 문화의 중심부에 올려놓았다. 그 자부심 때문인지 엥키 빌랄은 "만화나 문학에 비하면 담을 수 있는 내용의 폭이 좁은 영화는 하위 문화"라는 입장을 거침없이 밝힌다. 전세계적으로 만화가 대우받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인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이들 거장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 새로운 독자층과 작가층이 생겨나고 있다. 빌랄은 "최근의 프랑스 만화의 젊은 작가들은 판타지와 SF를 상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실험으로 연결된다면 "나날이 미쳐가고 있고, 곧 추락할 듯 보이는 시대"를 걱정하는 빌랄 같은 작가들에게 더없이 즐거운 일일 것이다.
[필름 2.0 2004-11]
[필름 2.0 2004-11]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