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20일 화요일

단순하게 살 수는 없다 엥키 빌랄이 일궈낸 프랑스 만화의 오늘



세계 SF 만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엥키 빌랄은 만화 언어와 영화 언어를 오가며 독창적인 시각 이미지를 창조한 인물이다. 만화와 영화에서 늘 미래를 배경으로 복잡한 세계를 건설하지만 그 안에서 언제나 예술과 인류의 현재를 고민하는 빌랄의 상상력은 곧 프랑스 만화의 현재와 이어진다.


"그러니까, 당신의 원작 만화 '니코폴' 3부작 가운데 두 번째인 '여인의 함정'을 바탕으로 영화 <우먼트랩>을 만들면서..."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엥키 빌랄이 말을 가로막는다. "아니, 이건 전혀 다른 작품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 원작 만화를 압축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12년 전에 그린 내 만화 '니코폴' 3부작은 나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시 들춰볼 생각도 안 했다." 그리고는 여태껏 쓰고 있던 짙은 색 선글라스를 벗어버렸다.


'니코폴' 3부작은 필립 드뤼예, 뫼비우스와 더불어 세계 SF 만화의 3대 거장 가운데 한 명인 엥키 빌랄,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총통 선거를 앞두고 권력의 암투가 치열하던 2023년의 독립 도시 공화국 파리를 배경으로 30년간 냉동됐다 깨어난 사나이 알시드 니코폴이 독수리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한 이집트 신 호루스를 만나 신들의 암투와 인간의 암투 사이에 끼어들게 된다는 내용이다. 니코폴은 극빈 계층과 소수 백인 부유 계층만이 살고 있는 미래의 파리에서 이 혼란한 세계를 버텨 내기 위해 보들레르의 시구를 암송하며 폐인처럼 살아간다. 1부 '신들의 카니발'부터 2부 '여인의 함정', 3부 '적도의 추위'에 이르기까지 이 방대한 설정의 만화가 완결되는 데 총 12년의 세월이 걸렸다. 심지어 완결된 3부작은 프랑스의 권위 있는 서평지 '리르'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와 당시의 모든 예술 출판물을 통틀어 '그 해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난감했다. 하지만 빌랄의 태도는 당당했다.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만화의 단편적인 느낌만으로 <우먼트랩>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선택을 하긴 했지만 철저히 본능에 따라 만든 전혀 새로운 것이다. 만화의 캐릭터들이 영화에 등장하지만 그들의 생각, 행동, 관계는 모두 달라졌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새로운 언어, 드로잉에서 그래픽으로


그의 말처럼 <우먼트랩>은 확실히 좀 다른 영화다. '니코폴' 3부작에서 니코폴과 사랑에 빠졌던 2부의 주인공 질 비오스콥이 전면에 나선다. 호루스 신에게 조종당하며 혼란한 미래 사회를 살아가던 니코폴의 일대기는 어느새 질과 니코폴, 그리고 그의 몸에 깃든 호루스 신의 야릇한 로맨스가 돼버린다. 약간의 상업성이 가미된 유럽형 SF 판타지 <우먼트랩>은 올해 봄 프랑스에서 개봉되어 박스오피스에서 예상 밖의 환대를 받았다. 여기엔 되새겨봐야 할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우먼트랩>은 모든 대사가 영어로 돼 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합작했으며 주연 배우들 역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국적 출신들로 구성됐다. 게다가 이 초국적 영화의 배경은 다국적 문화의 중심인 뉴욕이다. 빌랄은 그 이유를 두고 "뉴욕은 미래의 도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서구 사회가 맹신하는 자금, 재력, 체제를 보여 주기에 좋은 가장 상징적인 도시. 뉴욕은 미국이란 나라의 도시가 아니라 세계의 도시라는 느낌이 강하다"고 밝힌다. 그리고 여기에 이집트 신화와 정치적 음모, 외계인의 존재, 러브 스토리 등 인류 역사의 다양한 면면들을 녹여 놓았다. <우먼트랩>을 통해 유럽 문화의 통일이라도 이루어 보겠다는 심산일까? 빌랄은 "이렇게 복합 텍스트적인 작품을 만드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무엇이든 단순화시키려는 경향이야말로 우리의 지성과 창의력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단순화는 상업성에 초점을 둔 마케팅으로 연결될 뿐이며 할리우드영화들이 줄곧 해온 일이다. 문화를 빈곤케 하는 이런 경향에 모든 예술인들이 대항해야 한다. 그래서인가? 미국에서는 내 영화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배급이 결정되지 않고 있다"며 웃는다.

<우먼트랩>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살아 있는 배우를 제외한 모든 배경과 이미지가 CG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최근 주드 로가 주연한 할리우드영화 <월드 오브 투모로>나 일본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캐샨>, 프랭크 밀러의 만화가 원작인 <신 시티> 등이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지만 <우먼트랩>의 색감은 이들과는 또 다르다. 원작 만화에서 물감을 수십 차례 덧칠한 유화처럼 끈끈하고 관능적이면서 놀랄 만큼 치밀하게 미래의 세상을 그려내던 빌랄의 드로잉은 <우먼트랩>에서 푸른 빛과 잿빛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묘하게 뒤엉킨 그래픽 화면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전시일까 아니면 첨단의 기술력을 예술적 표현력으로 끌어올려 보겠다는 자신감일까? "예상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할리우드가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는 첨단 테크닉을 예술적 도구로 이용해 보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프랑스 관객들은 이런 용기 있는 도전을 이해해 주고 있는 편이다."


프랑스 만화의 견고한 토양


이렇듯 나름의 방식으로 예술적 표현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해온 빌랄 같은 작가들의 힘 때문에 프랑스 만화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비옥한 문화적 토양을 지니고 있다. 현실에 없는 세계를 형상화하고 얼마나 튼실한 구조의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느냐에 따라 SF 만화의 깊이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마련이다. 1970~198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SF 장르가 만들어낸 개념들과 이 장르를 철학과 문학 등에 접목시키는 뛰어난 만화 작가들이 여럿 등장했다. 필립 드뤼에, 뫼비우스, 프랑수아 슈이텐, 그리고 엥키 빌랄이 이 일련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지금까지 이어왔다. 이들로부터 견고하게 쌓아진 프랑스 SF 만화의 힘은 전세계 문화 예술의 최전선에서 온갖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프랑스 SF 만화의 아버지라 할 만한 작가 필립 드뤼에는 80년대 이후 일러스트와 회화, 조각, 다른 표현 형태들을 섭렵하며 프랑스 만화 독자들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SF 만화가 뫼비우스는 1984년에 아예 미국으로 이민, LA에 정착한 뒤 영화와 광고, 만화 캐릭터 산업,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 등 온갖 분야로 손을 뻗쳐 나갔다. 영화 <에일리언>의 의상 디자인을 맡고 다양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며 미국과 아시아의 만화계에도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엥키 빌랄의 활약도 대단했다. 그의 작품은 6년에 한 번꼴로 출간돼 왔지만 그때마다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우먼트랩>을 비롯해 <벙커 펠리스 호텔> <타이코 문> 등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알랭 레네의 <인생은 한 편의 소설이다>에서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영화 외에도 오페라 무대 디자인, 의상과 음반, 영화 포스터, SF 소설 표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로 발을 뻗어 나가고 있다. 다루고자 하는 정치적 이슈나 철학적 깊이에 있어서 다른 어떤 학자나 문학가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 프랑스 만화 거장들의 작품은 만화를 예술의 지평, 고급 문화의 중심부에 올려놓았다. 그 자부심 때문인지 엥키 빌랄은 "만화나 문학에 비하면 담을 수 있는 내용의 폭이 좁은 영화는 하위 문화"라는 입장을 거침없이 밝힌다. 전세계적으로 만화가 대우받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인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이들 거장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 새로운 독자층과 작가층이 생겨나고 있다. 빌랄은 "최근의 프랑스 만화의 젊은 작가들은 판타지와 SF를 상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실험으로 연결된다면 "나날이 미쳐가고 있고, 곧 추락할 듯 보이는 시대"를 걱정하는 빌랄 같은 작가들에게 더없이 즐거운 일일 것이다.
[필름 2.0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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